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 탄트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최초의 아시아-태평양 그룹의 사무총장으로, 최초의 [[아시아]] 출신 사무총장이라는 것에 의미가 깊다. 앞의 선대 사무총장들보다 5년 정도 더 사무총장 자리를 지켰다. 한편 그는 선대 총장이 사고로 죽은 특수한 상황 덕에 현재까지도 최장기 [[UN 사무총장]]으로 남아있다.[* 이는 갑자기 추락사고로 죽은 선대 총장의 잔여 임기까지 채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. 따라서 그의 실제 재임기간은 다른 사무총장보다 10년하고도 몇 달 더 많다. 즉 '''최장기 집권 사무총장'''이란 타이틀은 여전히 유효한 상황] 또한 역대 [[UN 사무총장]] 중에서 처음으로 3선 제의를 받았던 인물이다.[* [[UN]] 헌장에 보면 사무총장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. 따라서 그가 3선 제의를 받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.] 하지만 이를 고사하고 은퇴를 선언한다. 탄트는 [[1909년]] 1월 22일 [[미얀마]] 남서 해안지방인 판타나우에서 태어났다. 그는 국립고등학교와 랭곤대학교[* [[미얀마]] [[양곤]]에 위치한 종합대학으로 [[미얀마]]의 명문대학교이다.]를 졸업했다. 대학 졸업 후 [[1928년]]부터 [[1947년]]까지 저널리스트와 교사로 생활하였다. [[1947년]]에는 [[미얀마]]의 신문사장, 이듬해 방송국장이 되었다. [[1948년]] 전후로 [[미얀마]]의 당시 정치 상황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, 이런 [[미얀마]]의 긴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, 탄트는 [[미얀마]]의 첫 번째 수상이자 그의 절친힌 친구였던 우 누(U Nu)의 도움으로 험난한 환경을 해쳐나갈 수 있었다. 탄트는 [[1957년]]에 [[유엔]] 주재 [[미얀마]] 대사와 [[알제리]] 문제에 관한 [[아시아]] 그룹 상임 위원회 위원장, [[콩고]] 위원회 위원, [[유엔]] 자본 개발 기금 설립 위원 등을 지냈다.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탄트가 상당히 차분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. [[1961년]] 그의 전임자였던 [[다그 함마르셸드]]가 [[1961년]] [[콩고 내전]]을 조정하기 위해 [[콩고]]로 가던 중에,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.[* 하지만 최근 조사에 따르면, 사실상 콩고 우탕가의 권력자였던 촘베의 지시로 격추되어 사망했다고 보는것이 일반적이다. 2013년의 민간 조사 위원회의 발표를 시작으로, UN에선 재조사를 지시했고, 이후 수잔 윌리엄스의 관련 저서 등 여러 정황이 밝혀졌다. 영국 가디언지의 2014년도 기사에 따르면 얀 판 리세험(Jan van Risseghem)이라는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전직 영국군 조종사이자 당시 촘베 정권의 유명한 파일럿이었던 이 사람이 바로 다그 함마르셸드의 DC-6항공기를 추락케 한 원인이라고 밝혔는데, 이는 전직 미 해군 조종사이자 NSA의 무전 청취요원이었던 찰스 사우스홀(Charles Southall)과 여러 동료 요원들이 1961년 사고 당일 [[키프로스]]의 청취소에서 청취 임무중 3,000마일 거리의 은돌라에서 들리는 비행기의 무전을 들었던 내용을 그 증거로 내세웠다. 그 내용은 두 항공기 조종사의 무전이었는데, 각각 ' 수송기가 낮게 비행 중인 것이 보인다. 모든 등이 켜져있다. 하강하여 격추하도록 하겠다. 그렇다. 트랜스에어 DC-6 항공기다 ' 라는 말의 정체 불명의 항공기 조종사의 무전을 시작으로, 직후 들려온 다른 무선에선 또 다른 조종사가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' 맞았다! 화염이 보인다! 추락한다! ' 라는 말을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. 처음을 들린 조종사의 목소리는 매우 침착하고 프로페셔널 했다고 이야기했는데, 이를 바탕으로 첫 번째로 들린 목소리의 파일럿이 당시 함마르셸드가 타고있던 DC-6항공기를 격추하는 임무를 맡았던 비행기의 조종사가 말했던 무전이라고 말하였다. 추가로 DC-6 항공기를 공격한 기종도 확인되었는데, 당시 카탕가 공군으로 복무중이던 얀 판 리세험이 조종하고 또한 기관포 두정을 장착하는 개조를 거친 CM-170 미스테르 훈련기로 확인되었다. 얀 판 리세험은 이후 벨기에로 건너가 벨기에 공군에서 복무한다.] 때문에 그는 [[UN]]에서 사무총장직 제안을 받고 제 3대 [[UN 사무총장]]에 취임하게 된다. 그의 첫 임기엔, [[1961년]] 10월 [[소련]]과 [[미국]]이 [[쿠바]]를 놓고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[[냉전]]이 심화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. [[존 케네디]] 대통령은 [[소련]]이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들을 [[쿠바]] 밖으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국제 정세가 상당히 긴박했다.[* 2차 대전 종전이후, 양대 강국으로 부상한 [[미국]]과 [[소련]]은 각자 영향력을 넓히는 것에 주력했는데, 이 과정에서 충돌을 수반하면서 [[냉전]]이 심화되었다. 그런 [[미국]]과 [[소련]]의 대치상황 속에서 우탄트는 임기를 시작한 것. 탄트가 겪은 [[쿠바 미사일 위기]]또한 앞서 설명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두 [[강대국]]이 대치하다가 일어난 사건.] 그는 이런 긴박한 정세 속에서 [[미국]]과 [[소련]]사이의 대치가 더 큰 재앙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[[미국]] 대통령이던 [[존 케네디]]와 [[소련 공산당]] 서기장이었던 [[흐루쇼프]]와의 여러 차례 중재를 거쳐 평화 협상을 이끌어 냈다. 그 결과 [[소련]]과 [[미국]]간에 [[쿠바 미사일 위기]]는 [[소련군]]이 철수하는 것으로 정리됐다.[* [[미국]]과의 세계대전을 감수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[[흐루쇼프]]는 한 발 뒤로 물러난다. 때문에 [[흐루쇼프]]는 당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고, [[사회주의]] 진영의 신흥 맹주였던 [[중화인민공화국]](현 중국)과의 외교 관계에 금이 갔다. 어떻게 보면 [[미국]]의 강한 한 수가 [[소련]]을 물러나게 했다고 '''볼 수'''도 있음.] [[1961년]] 12월 [[다그 함마르셸드]]가 다 완수하지 못했던 [[콩고 내전]] 종식시키기 위해 작전명 그랜드슬램(Grandslam)을 지시하면서 분쟁을 매듭지었다. 탄트는 첫 번째 임기를 마침과 동시에 [[안전보장이사회]]의 만장일치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. 그가 두 번째 임기를 지내는 동안 [[1965년]]에 [[베트남 전쟁]]이 발발했는데, 탄트는 베트남의 [[공산주의|공산화]]를 막겠다는 [[미국]]의 명분 없는 전쟁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.[* 당시 [[사회주의]] 공화국으로 독립했던 [[베트남]]을 단지 "공산화 국가의 탄생을 막겠다"라는 [[미국]]의 단순 이념적 욕심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비난이 거셌다. 정당한 명분도 부족했고, 꼭 필요한 전쟁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냉전 상황 속에 있었던 [[미국]]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던 전쟁으로 기억됨. 하지만 [[연합국|강대국]]으로 구성된 [[상임이사국]]의 승낙을 받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사무총장의 자리에서 [[강대국]]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개적 비난을 한 것은 이례적이고 손에 꼽을 만한 일.] 하지만 [[상임이사국]]으로 있었던 초강대국 [[미국]]주도의 냉전 대리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막거나 중재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. 그의 임기 말기엔 [[강대국]]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[[아프리카]] 독립국과 [[아시아]] [[UN]]가입에 대한 문제를 다수 처리하였다. 탄트는 세 번째 임기를 거부하고 [[1971년]] [[UN 사무총장]]의 자리에서 은퇴한다 은퇴 후, 그는 [[뉴욕]]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폐암으로 [[1974년]] 향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. 국제무대에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활약했던 미얀마의 외교관 우탄트는 현재까지도 [[미얀마]]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. 우탄트의 국민적 존경심은 그의 고향인 판타나우를 그의 이름을 딴 "판타나우 탄트"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정도로 깊다. 사실 우탄트의 본명은 "탄트(Thant)"이다. 탄트 앞에 붙은 "우(U)"는 영어로 "미스터(Mr.)"정도로 해석된다. 이것이 앞에 붙어 "우탄트"로 이름이 굳어진 것이다.[* 보통 [[미얀마]] 유명인사들의 원래 이름에 "우(U)"가 붙어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가 많고, 또 그것이 일반적이다. 예컨테 그의 절친한 정치적 동반자 였던 누(Nu)도 앞에 "우(U)"가 붙으면서 기존의 이름인 누(Nu)보단 "우 누(U Nu)"로 잘 알려진 것이 대표적 사례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